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박정자

   

  지은이 : 박정자                 출판사 : 기파랑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올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용돈이 부족한 10대 때는 정말 갖고 싶은 것을 목표를 세운 다음 몇달이고 돈을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었을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그 기분이 평생갈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노력한 결과가 있었기에 뿌듯함은 지금보다 오래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만족감이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랜 계획을 세워 무언가를 사본게 언제적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현재 나의 소비는 쉽게 끓어 올랐다가 쉽게 사그라드는 번복이 대부분이다. '다른 걸 안사면 되지','이건 필요한 거니까' 라는 위로를 던져 보아도 기쁨 보다는 우울함이 금방 파고든다. 무리를 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였던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부터 책에 빠져 들면서 모든걸 제쳐두고 읽고 싶은 책을 몽땅 샀다. 할인하면 사고 쿠폰이 있음 사고 적립금이 많으면 사고 '책은 많이 사도 괜찮아'란 위로를 던지며 산 책이 엄청 쌓여 버렸다. 언젠가는 읽겠지만 김영하님의 말대로 책을 읽을 시간까지 지불했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어 나의 미래의 시간들을 너무 맣이 저당 잡힌 것 같아 조금은 불안해 지기도 한다. '요즘은 시간을 산다'는 본문의 내용과 다르게 나는 반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로빈슨 크루소가 사치를 했던가? 자세히 일어본 기억은 없지만 홀로 섬에 갇혀 사치했다라기 보단 오히려 소비의 고립을 만났을 것 같은데.. 사치라...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소비의 사회, 현대 사회와 팝아트, 현대성의 풍경 총 세 단락으로 나뉘어진 소비의 행태 속에서 첫 단락 '소비의 사회'를 읽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쇼핑을 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 그리고 나의 소비 안에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 소비에서 읽을 수 있는 현대상등등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나의 수준에 맞추어서 소비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가치 척도를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상업적 틀 속에서 움직였던 것이였다. 그런 것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만든 사회였고 그 안에 필요한 구조였던 것이다. 소비라는 단순한 행위가 이렇게 큰 세계를 구축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효용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 문학을 가장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나이니 이런류의 책과의 교류도 부족하고 읽어도 100% 이해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받아들이니 커다란 부담은 없었다.

 

  '현대 사회와 팝아트' , '현대성의 풍경'을 통해 '소비의 사회'와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늘상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 또다른 소비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다양함과 광범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단락이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의 사회'와 동떨어진 느낌에 이것이 소비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란 제목에만 매여있는 나를 보면서 아직 내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쓸함도 들었다. 좀 더 넓고 틔인 식견을 가지지 못한 내가 2.3단락의 글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의 내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 연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언어의 다양함과 자극성이었다. 내가 문외한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끝까지 편하게 읽히기에는 내가 모르는 언어의 유희는 넘쳤다. 단 한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만나 보았지만 처음의 매끄러움과 편안함을 유지하지 못해 그 부분이 아쉬웠다. 이쪽 분야의 문외한인 내가 이 정도 읽은 것도 다행이지만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어 드는 생각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소비 속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기에 우리를 자극할 만한 예시들이 많았다. 최신의 정보와 통계가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 것은 사실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좇는다는 느낌과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 하다는 걱정도 들었지만 소비라는 다양함의 세계를 맛본 것도 사실이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도 많았지만 역시 책을 통한 간접경험과 지식의 전달이 시간을 저당잡혔다고 우울해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늘 즐거움을 갖고 책을 읽었는데 책의 양에 기가 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 눌림을 줄이기 위해 쌓여 있는 책의 양을 줄여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누렸던 사치와 책에 대한 나의 사치가 실은 별반 다를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나 혼자만의 독식이 아닌 즐거움과 나눔의 전환은 개개인의 숙제일 것이다.
 
 

2006년 9월

by 태극취호 | 2009/01/10 12:58 | 인문 | 트랙백 | 덧글(0)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고골

 
  지은이 : 고골                              출판사 : 민음사



  오늘처럼 몹시 추운 날이면 러시아의 추위를 상상해 본다. 더불어 따뜻한 방에서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품어 본다. 추운 겨울에는 왠지 장편이 읽기 좋고, 어느 정도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이라면 금상첨화라는 생각 때문이다. 러시아가 추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추위가 모든 러시아 문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로 읽었던 러시아 문학에서의 겨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고골의 '외투'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찬바람이 몸 속으로 스며들 때면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고충이 생각난다. 그는 얼마나 추웠을까. 그리고 새 외투가 생겼을 때 얼마나 따뜻하고 뿌듯했을까. 외투를 뺏긴 그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한참 러시아 문학에 빠져 있을 때, 고골의 작품을 대했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 문학이라면 환장하던 내가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독특함, 당황스러움, 만족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이 짙다는 이유로 고골의 작품을 제대로 탐독을 못했다는 느낌이 늘 내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을 소개할 기회가 생겨서 다시 한번 읽었는데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익숙함 속의 새로움, 낯섬 가운데 밀려오는 흥미로움. 그런 흐름 속에서 만난 고골의 작품들은 여전히 색다른 매력을 주고 있었다.

 

  총 다섯 편의 단편 중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었던 작품은 '광인일기'와 '네프스끼 거리'였다. '코','외투','자화상'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부분이 많은데, 광인일기와 네프스끼 거리는 왠지 모호함 속에 묻혀 버린 듯 흐릿했다. 그래서 두 작품을 더 염두해서 읽었는데 두번째 읽음에도 첫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처음 읽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놓쳐 버렸던 것들을 되돌아 봄으로써 내 기억속에 비어버린 부분을 채워갈 수 있을거라 생각 했다. 그러나 그 두작품은 다시 읽고 보니 채워지지 않은 의문들이 여전하더라도 늘 찌꺼기 처럼 남아 있던 아쉬움은 어느 정도 해소된 기분이었다. 나의 집중이 흐트러져서 생긴 비움이 아니라는 안심 때문이었을까.

 

  관심을 요했던 두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 버려서인지 나머지 세 작품은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코를 잃어 버리고 한바탕 웃지 못할 헤프닝을 벌였던 <코>. 외투를 잃고 충격으로 목숨을 잃은 관리의 사연을 다룬 <외투>. 어느 고리대금업자의 자화상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자화상>. 모두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음에도 고골 특유의 스타일에 젖어 든 시간들은 독특했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을 읽으면서 익숙해져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과 그들의 문화의 바탕이 있었기에 고골의 작품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문학의 첫 작품이 고골의 작품이라면 다른 작품들이 서정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고골의 작품을 다른 러시아 작품들에 비해 늦게 접해서 고골의 작품은 독특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러시아를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의 러시아 문학에 고골의 작품들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뿌쉬낀, 도스또예프스끼를 주로 읽다 접한 그의 작품은 색깔이 달랐다. 자신의 운명처럼 광기적인 면에 해학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느껴졌음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골의 작품은 러시아의 익숙함에만 젖어 러시아 문학을 찾아 헤메던 내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 주었다. 고골의 작품을 접하기 전에 만났던 러시아 문학들은 깊은 내면을 다룬 작품들이었다면, 고골의 작품은 감추고 싶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유머러스하게 다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유머스러운 면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그가 그려내는 상황들에서 통쾌하게 웃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웃음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듯 고골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고 단정 짓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고골의 작품들이 왠지 겨울의 깊은 밤과 어울리는 것 같아 추운 날씨 속에 잠시 그의 세계로 잠입해 보게 된다.
 
 
2007년 10월

by 태극취호 | 2009/01/10 12:51 | 문학 | 트랙백 | 덧글(0)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 - 민현식

  
 지은이 : 민현식                                        출판사 : 돌베개
 
  
  때로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이 아닌 막상 호기심을 일으키고 보니 그 결과에 동화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고를때 나의 호기심을 충분히 검토해 보지 않았음이 바로 드러났다. '건축에게' 여기까지는 좋았다. 건축에 관해 워낙 문외한인지라 호기심에 읽어보고 싶었을 뿐이였는데 미쳐 '시대를 묻다'라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이 표면적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시대를 묻는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켰어야 했는데 '건축'이라는 화두에 쏠려 시대를 묻는다는 것은 건축을 뒷받침해 주는 적절한 배경으로 생각했다.
 
  분명 이 책에서 건축 혹은 건물이 주축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말함은 건축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 무게감의 낯섬은 건축가를 인식하고 있는 나의 의식을 것이다. 분명 건축을 한다는 것은 미적 감각을 떠나 창의력과 독창성이 부여 되는 예술의 혼이 담겨 있는 작업임에도 단순히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어느 순간 건축가라는 존재를 깨닫고 있는게 아닌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똑같은 건물들에 질려 건축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의 경관과 독특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같은 것들만 지어내는 주변의 건축물들을 보면 사람이 지었다라기 보다는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인간미가 사라진 삭막한 세계일 뿐이였다. 그랬기에 내가 인식하고 있는 건축가는 노동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요소일 뿐이였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지적이면서도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건축가는 지적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이들이라고. 이 말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지만 이 말을 능가하는 철학적 사고와 아름다움을 건축가들이 지니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분명 이들은 건축가들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노동의 거침도 아니였고 자의식의 젠체도 아니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좁은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였다. 건축을 통한 시대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놓고 요즘의 세태나 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 안에 들어 있는 그들의 혼을 말하고 있었다. 건축을 통해 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술의 미는 제쳐두고 그들의 언어는 날카롭고 깊었다. 때론 우뚝 솟은 건물 안에서 때론 야트막하고 자연에 순응하듯 도심의 한가운데 떠 있는 포근함 속에서 그들은 모든걸 토해내고 있었따. 그 토함은 너무 깊은 곳에서 올라 왔기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혼돈의 늪 속에 빠져 버렸지만 허우적 거림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나 유명한 건축을 또는 건축도시의 거대함, 위대함 앞에 주늑들지 않고 허우적 거림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밖에서 건물을 쳐다보는 능동적인 시각을 버리고 건물 안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준 그들의 배려 덕분이였다. 실로 밖에서만 찍어대는 건물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는 이방인에 불구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봤을 때의 시각의 충족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였다. 그래서 지적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이들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였다. 밖에서 바라볼때의 낯섬은 존재하지 않은 채 공간속의 포근함은 안으로 들어다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된 환경결정론의 의도는 늘 나의 갈망이였지만 이 책 속의 건축물들을 보고 나니 그 의도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면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신적,신체적 복지가 향상된다는 환경 결정론은 비단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투기로써 집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집을 꾸미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말은 세속을 잊고 욕심을 버리고 내 삶의 향상을 돕고 있었다.
 
 
  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다잡아 보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방이지만 편안함을 알았노라
  
 
  어쩜 단아하면서 햇살이 그득한 집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동안 창을 통한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을 안고 사는 시각을 지녀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2007년 4월

by 태극취호 | 2009/01/10 12:49 | 인문 | 트랙백 | 덧글(0)

전쟁을 위한 기도 - 마크 트웨인

  

  지은이 : 마크 트웨인                    출판사 : 돌베개

  
 

  그런 기도를 해본적이 있다. 나만 도와 달라고, 우리를 먼저 도와 달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 뒤에 도와도 된다고 기도한 적이 많다. 그런 기도는 모순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모순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모순을 파헤친 어느 한사람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의 저자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 작품을 쓰고 자신이 살아 생전에 출판될 수 없을 것이란 걸 알았다. 이 책이 불러올 파장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담았지만 그 진실은 죽은 자의 몫이라고 일침을 가한 후 그는 죽었고 그가 죽은 후에 이 책은 출판되었다. 무척 짧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들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았다.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을 위해 교회에 모여 그들의 승리와 조국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기도하는 목사 곁으로 나온다. 뜨거운 기도를 마친 목사와 성도들은 그 사람의 존재에 기겁을 한다. 감히 기도할 때 목사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이 뜨거운 분위기에 맞이 않는 차가운 분위기는 교회안을 순식간에 고요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역설한다.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날려 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 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얼룩지게 하소서...'
 
 
  지금 당신들의 기도의 내용은 이러하며 전쟁터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낱낱이 고하며 비난한다. 그 기도를 듣고 모두는 경악을 하고 만다. 감히 우리가 저런 기도를 드렸다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승리를 하고 우리의 아들들이 많은 적을 물리치면 분명 적진의 상황은 반대가 될 것이고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을 적진의 가정과 개인에게로 돌려 주십사하고 하는 기도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뜻에서 한 기도가 아니며 진정한 의도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마크 트웨인이 말한 진실은 무엇이며 신성모독이라고 일컬어 질 것을 인정함은 무엇이였을까. 단순이 그런 모순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였을까?
 
  그것 보다는 전쟁 자체를 비난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있는 전쟁이라도 결국은 무언가를 차지하고 짓밟기 위해서인데 그런 전쟁을 위해 한쪽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도부터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역설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이 따르기에 그 뜻을 온전히 실행 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전쟁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또한 너무 이기적이지 않았나 고민해 보게 된다. 나의 이기심의 너머에는 내가 아랑곳하지 않는 상처가 득시글 대기 때문이다. 그 상처의 주범은 내가 아니였으며 상처를 내어 나의 행복을 불리려 했음은 아니였을까? 민감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중립을 취할 수 밖에 없고 신성모독이니 진실이니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가 없다. 나느 그 양면성 속에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립을 취하든 어느 쪽으로 기울든 나를 한번은 돌아봐야 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이였는지를. 그 진실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그 생각속에 분노가 일어나고 고통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진정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그 기도 뿐이였나를.
 
  작은 모순들이 뭉쳐서 편견이 되고 그 편견들은 욕심과 이기심을 낳고 그 이기심이 당연시 되었을 때 이면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한 일례는 주변에 널리고 널려 있다. 반대편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을 한번 생각해 보라. 저들이 했던 기도와 내가 과연 다를바가 있을까. 승리를 위한 기도가 아닌 전쟁을 위한 기도의 제목에는 이러한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2007년 5월

by 태극취호 | 2009/01/10 12:45 | 문학 | 트랙백 | 덧글(0)

성과 이성 - 리차드 포스너

 
 지은이 : 리차드 포스너                                출판사 : 말글빛냄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이성 보다는 성에 관해서 좀 더 포괄적인 이해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직도 나에게 성은 부끄러운 것이며, 감추고 싶은 것이라는 생각이 짙었기에 이 책을 통해서 나의 생각을 좀 틔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기까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일 년 이라는 시간은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의의와 내가 얻고자 했던 것들은 이미 퇴색이 되어 버린 후였다. 그랬기에 읽다 만 책을 다시 연결해서 읽는 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이 책을 다 읽기는 했지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헤메다 온 기분이다.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성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직업을 살펴보자면 판사에다 시카코대학 로스쿨 교수이다. 그의 직업만으로 보자면 이 책을 썼다는 것이 의아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책이 성이론에만 치중된 다른 책들보다 조금 더 방대한 양이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학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사실에 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이론에 관한 책이라고 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며 우리의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기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한 명의 판사로써 미국 사람들, 특히 법정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무지, 편견, 수치심, 위선 등의 감정을 없애버리는 것에 사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의 부제목을 보면 '섹슈얼리티의 역사와 이론'이라고 되어 있다. 섹슈얼리티란 단어는 성과 관련된 태도, 관습, 행위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섹슈얼리티의 뜻을 알았다면 어느 정도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감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굵직한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부적인 소주제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 속의 정보를 양껏 흡수하기에는 무리다. 저자도 밝혔듯이 성이론에만 치중된 것이 아니라 많은 자료들을 활용해서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처럼 한쪽으로만 궁금해 하는 독자나 포괄적인 이론에 익숙해져 있지 않는 독자들은 헤멜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없이 펴쳐놓는 방대한 정보에 기가 꺽여 버릴 수 밖에 없다.

 

  총 3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섹슈얼리티의 역사>,<섹슈얼리티의 이론>,<섹슈얼리티의 규제>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도 수없이 갈라지고 쪼개지는 주제 속에서 밑바탕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게 사실이다. 한 주제 만으로도 깊이 파고 들기까지는 수없는 난관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저자는 너무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어서 읽기에만 치중하기도 했다. 또한 다루기 거북한 모든 주제들을 서슴없이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는 나의 편견이 깨지지 않는 것인지, 이것들을 내가 알아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단순한 성문제보다 더 문란해지고 문제가 되어 가고 있는 성 문제를 끄집어 내다 보니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성이라고 하면 섹스라고 정의해 버리는 무지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성 문제가 단순히 의식과 교육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요인에 따라 정해 진다는 새로운 개념을 알아가기도 했다. 그런의도로 저자는 껄끄러운 성적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끄집어 내고 비판한 것은 획일화된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저자의 이론을 내가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다. 여기 저기서 튀어 나오는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나조차 헷갈려서 우후죽순격으로 저자의 많은 말들을 인용 했지만 여러 학문의 이론을 바탕으로 성의 의미를 살피고 비이성적인 행위가 바로잡힐 수 있기를 희망하는 저자의 생각만 읽어내도 충분할 것 같다. 콩트는 "안다는 것은 예측하기 위한 일이고, 예측한다는 것은 통제하기 위한 일이다"라고 했다. 저자는 콩트의 말에 빗대어 이론을 세우는 것은 반론한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사실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힌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론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모든 것을 기정화사실로 받아 들이는 것보다 이론과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배분하여 올바른 이성을 확립하는 것이 저저아 의도에 조금이나마 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타 및 인쇄, 번역 오류


 

p. 38. 첫째 줄 <데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었다.> 37페이지에 씌여진 내용이 38페이지에 다시 인쇄가 되어 있었다.

 

p. 82. <앞에서 인간이 신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보는 기독교의 관점이~> 만들어졌다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p. 147 <물론 인간의 특성이 비해서 더 많은 성적 이형~> 특성에 가 아닐까 생각한다.

 

p. 226. <결혼의 친밀성을 배제함으로써 아내들이 다른 곳에을 엿볼 수 있었다.> 곳을 이겠지?

 

p. 425 <가능성이 높을 경우 처벌의 강도 역시 무거워 것이다.> 무거워 질 것이다 가 아닐까?

 

p. 537 <사실상 많은 주의 법원들이       사건에서 조지아 주의 법과 ~> 법원들이 다음에 공백이 있다.

         무슨 사건인지가 빠진 것 같다.

 

 

 

 

2008년 4월

by 태극취호 | 2009/01/10 12:15 | 인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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